반독 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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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반독 감정은 독일인에 대한 적대감, 혐오, 편견을 의미한다.
19세기 이전 러시아에서 반독 감정이 처음 나타났으며,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 캐나다, 호주, 미국 등에서 독일인에 대한 적대감이 폭력 사태, 재산 약탈, 이름 변경 등으로 나타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영국에서 "분노 캠페인"이 벌어졌고, 미국에서는 독일계 미국인이 의심을 받았다. 전쟁 후, 독일의 빠른 회복은 일부 사람들에게 불길하게 보였고, 나치 독일의 만행으로 인해 반독 감정은 지속되었다.
현대에는 이스라엘에서 바그너 음악 연주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유럽에서는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반독 감정이 나타나고 있다. 영국 축구 문화에서는 반독일 응원가가 등장하며, 폴란드에서는 반독일 수사가 선거에서 활용되기도 한다. 네덜란드, 스위스,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도 반독 감정이 나타나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독일 내 인종차별 경험을 공유하며 반독 감정이 나타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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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독 감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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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정의 | 독일, 독일인, 독일 문화에 대한 반감 또는 공포 |
관련 용어 | 독일 혐오증 반독일 정서 |
역사적 배경 | |
원인 |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독일의 침략과 잔혹 행위 독일의 나치즘과 홀로코스트 역사적 경쟁 및 갈등 경제적 경쟁 문화적 차이 |
국가별 현황 | |
프랑스 |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 특히 프랑스 혁명 전쟁, 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
폴란드 |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의 침략과 점령 |
러시아 |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의 침략 |
미국 |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한 반독일 정서 |
영국 |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과의 전쟁으로 인한 반독일 정서 |
대한민국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 제국의 식민지배로 인한 간접적인 영향, 독일 문화에 대한 무관심 또는 오해 |
현대의 반독일 정서 | |
유럽 | 독일의 유럽 연합 내에서의 경제적 영향력에 대한 비판, 유럽 재정 위기 당시 독일의 역할에 대한 비판 |
이스라엘 | 홀로코스트에 대한 기억, 독일의 이스라엘 정책에 대한 비판 |
기타 | 독일 문화에 대한 거부감, 독일인의 행동 양식에 대한 비판 |
관련 사건 및 논란 | |
같이 보기 | |
관련 항목 | 독일 공포증 (Germanophobia) 반독일주의 (Anti-Germanism) 친독일주의 (Germanophilia) 앵글로포비아 혐한 반일 감정 |
2. 역사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는 크림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반독 감정이 나타났다. 이러한 감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규모 작가 집단, 특히 좌익 정치 신문을 중심으로 나타났으며, 1864년에는 더욱 심화되었다.[9]
미하일 로모노소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러시아 제국 전역에는 로모노소프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구성원(대부분 독일계)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당시 독일 학자들은 러시아어를 소홀히 하고 러시아 국민의 자금을 받으면서 외국어로 기사를 게재한다고 비판받았다.[9]
이러한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반독 감정은 러시아에서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이는 황실의 독일계 혈통과 러시아 정치 엘리트 내에 많은 독일계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0]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1870년대 영국에서 독일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처음 나왔다.[11][12]
2. 1. 19세기 이전
1850년대 중반과 1860년대에 러시아에서는 크림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반독 감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감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규모 작가 집단, 특히 좌익 정치 신문을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었다.[9] 1864년에는 반독 감정이 더욱 심화되기도 하였다.[9]이듬해 미하일 로모노소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로모노소프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구성원(대부분 독일계)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는 기사가 러시아 제국 전역에 게재되었다. 당시 독일 학자들은 러시아어를 소홀히 하고 러시아 국민의 자금을 받으면서 외국어로 기사를 게재한다고 비판받았다.[9]
이러한 언론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반독 감정은 러시아에서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이는 황실의 독일계 혈통과 러시아 정치 엘리트 내에 많은 독일계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0]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1870년대 영국에서 독일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처음 나왔다.[11][12]
2. 1. 1. 러시아
1850년대 중반과 1860년대에 러시아에서는 크림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발로 반독 감정이 일어났다. 이러한 감정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규모 작가 집단, 특히 좌익 정치 신문을 중심으로 한정되어 있었다.[9] 1864년, "셰도페로티"라는 필명을 사용한 한 작가가 폴란드에 자치를 부여하고 발트 독일 귀족의 발트 총독부와 핀란드의 특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사를 발표하면서 반독 감정이 심화되기 시작했다. 미하일 카트코프는 ''모스크바 뉴스''에 이 기사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글을 게재했고, 이는 러시아 작가들이 유럽인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분노에 찬 기사를 쏟아내는 계기가 되었다. 일부 기사에서는 독일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나타나기도 했다.[9]이듬해 미하일 로모노소프 사망 100주년을 맞아, 로모노소프가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외국인 구성원(대부분 독일계)에게 겪었던 어려움을 언급하는 기사가 러시아 제국 전역에 게재되었다. 작가들은 당시 독일 학자들이 러시아어를 소홀히 하고 러시아 국민의 자금을 받으면서 외국어로 기사를 게재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고 동방 정교회를 따르지 않는 독일계 러시아 시민은 외국인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더불어 독일계 출신은 "러시아에 대한 연대"가 부족할 수 있으므로 외교 직책을 맡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9]
이러한 언론의 독일인 비판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반독 감정은 러시아에서 널리 확산되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이는 황실의 독일계 혈통과 러시아 정치 엘리트 내에 많은 독일계 인물이 존재했기 때문이다.[10]
2. 1. 2. 영국
1870~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한 이후, 1870년대 영국에서 독일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이 처음 나왔다.[11][12] 영국 전쟁 계획가들은 독일의 영국 침공 가능성을 막아야 한다고 믿었다.[13]2. 2.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독일 제국이 중립국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침공했을 때, 독일군은 독일 군사법에 따라 민간인들을 군사 재판에 회부했고, 그 결과 6,500명이 처형되었다.[27] 이러한 행위는 연합국에 의해 과장되어 선전 도구로 활용되었으며, 독일인을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훈족'으로 묘사하는 잔혹 행위 선전이 제작되었다.
2. 2. 1. 영국
영국에서는 반독일 감정으로 인해 폭동이 발생하고, 독일인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에 대한 폭행이 발생했으며, 독일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소유한 사업체가 약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때로는 반유대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다.[28]반독일 감정이 심화되면서 영국 왕실에 대한 의혹까지 제기되었다. 조지 5세는 자신의 독일식 이름인 작센코부르크고타를 윈저로 변경하고, 영국 신민인 친척들을 대신하여 모든 독일식 칭호와 작위를 포기하도록 설득당했다.[29] 루이 오브 바텐버그 공작은 자신의 이름을 마운트배튼으로 변경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해군 최고위직인 해군 원수직에서 사임해야 했다.[30]
저먼 셰퍼드는 완곡하게 "알사시안"으로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영국 케넬 클럽은 1977년에야 '저먼 셰퍼드'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다시 사용하도록 허가했다. 독일 비스킷은 엠파이어 비스킷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런던의 여러 거리들은 독일 지명이나 유명한 독일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는데, 이러한 거리들의 이름이 변경되었다. 예를 들어, 캣퍼드의 ''베를린 로드''는 ''캐나디언 애비뉴''로, 이즐링턴의 ''비스마르크 로드''는 ''워털로우 로드''로 변경되었다.[31]
2. 2. 2. 캐나다
제1차 세계 대전 전후 및 문화적 제재 기간 동안 온타리오주 워털루 군의 키치너, 온타리오(당시에는 베를린, 온타리오라고 불림)을 포함한 게르만 공동체에서 반독 감정이 있었다.[34] 전쟁 초기에는 브리티시컬럼비아주의 빅토리아와 앨버타주의 캘거리에서 반독 시위가 벌어졌다.이러한 반독 감정은 1916년 베를린에서 키치너로 이름 변경을 촉발했다. 이 도시는 "키치너 경은 당신을 원한다" 모집 포스터에 유명하게 등장한 키치너 경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전에 리스트, 훔볼트, 실러, 비스마르크 등의 이름을 따서 지었던 토론토의 여러 거리는 발모럴과 같이 영국과의 강한 연관성을 가진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자신을 캐나다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아직 시민권을 얻지 못한 독일 출신 이민자들은 전쟁 중 수용소에 억류되었다.[36] 캐나다 전역의 수용소는 1915년에 문을 열었고, 8,579명의 "적국인"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억류되었다. 이들 중 많은 수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우크라이나 출신의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민자였다. 단 3,138명만이 전쟁 포로로 분류되었고 나머지는 민간인이었다.[44][45]
2. 2. 3. 호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호주에서 독일계 주민들은 "적국 외국인"으로 선포되었다.[46][47] 전쟁 동안 약 4,500명의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계 "적국 외국인"이 호주에서 억류되었다.[47]

1914년 8월 10일 공식 포고령에 따라 모든 독일 시민은 가장 가까운 경찰서에 거주지를 등록하고 주소 변경 사항을 당국에 통보해야 했다. 1915년 5월 27일 외국인 제한령에 따라, 억류되지 않은 적국 외국인은 일주일에 한 번 경찰에 신고해야 했으며, 공식 허가 없이 주소를 변경할 수 없었다. 1915년 7월 제한령 수정안은 적국 외국인과 귀화 시민이 자신의 이름이나 운영하는 사업의 이름을 변경하는 것을 금지했다. 1914년 전쟁 예방법(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존속)에 따라 독일어 자료의 출판이 금지되었고, 루터교 교회에 소속된 학교는 독일어를 교육 언어로 사용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당국에 의해 폐쇄되었다. 독일 클럽과 협회도 폐쇄되었다.[48]
정착지와 거리의 원래 독일 이름이 공식적으로 변경되었다. 남호주에서는 "Grunthal"이 "베르됭"으로, "Krichauff"가 "Beatty"로 변경되었다. 뉴사우스웨일스에서는 "Germantown"이 잠수함 사령관 노먼 더글러스 홀브룩을 기려 "홀브룩"으로 변경되었다.[48] 이러한 압력은 69개의 마을 이름을 변경한 남호주에서 가장 강했다. 여기에는 페테르부르크 (남호주)가 피터버러로 변경된 것도 포함된다 (참고: 독일어 이름에서 변경된 호주 지명).
반독 감정의 대부분은 독일 출생 또는 후손의 모든 사람이 무비판적으로 독일을 지지한다는 생각을 만들려고 했던 언론에 의해 조성되었다. 이는 존 모나쉬 장군과 같은 많은 독일인과 그 후손이 유능하고 명예롭게 호주를 섬겼음에도 불구하고 발생했다. 1915년에 널리 배포된 소책자는 "3,000명 이상의 독일 스파이가 주 전역에 흩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반독일 선전은 또한 호주 시장에서 독일을 경쟁자로 제거할 기회를 잡고 싶어하는 여러 현지 및 외국 회사에 의해 영감을 받았다. 호주 내 독일인은 그들의 출생 배경으로 인해 점점 더 악으로 묘사되었다.[48]
2. 2. 4. 미국
1917년 미국이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면서, 독일계 미국인들은 독일에 동조한다는 의심과 함께 공격을 받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하이픈 아메리카니즘"을 비난하며 이중 국적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50]


일부 독일계 미국인들은 충성심에 대한 의심과 공격을 받았다. 적십자사는 파괴 행위를 우려하여 독일 성을 가진 사람들의 가입을 금지했다. 일리노이주 콜린스빌에서는 독일 태생인 로버트 프라거가 린치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5]
시카고에서는 프레데릭 스톡이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오케스트라는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프랑스 작곡가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음악으로 대체했다.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자 카를 묵과 단원들은 억류되기도 했다.[58]
독일어 거리 이름이 변경되었고, 많은 기업들이 이름을 변경했다. 시카고에서는 독일 병원이 그랜트 병원으로, 뉴욕시의 독일 진료소와 독일 병원은 각각 레녹스 힐 병원과 와이코프 하이츠 병원으로 개명되었다.[62] 많은 학교에서 독일어 수업을 중단했고,[61] 독일어로 출판된 책은 도서관에서 제거되거나 불태워졌다.[61][69] 사우어크라우트는 "자유 양배추"로,[64] 독일 홍역은 "자유 홍역"으로 불리는 등 독일어 기원의 단어가 변경되었다.[73]

많은 독일계 미국인들은 자신의 이름을 영어화했다(예: 슈미트에서 스미스로).[74]
2. 3.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등 잔혹 행위는 전 세계적으로 반독 감정을 크게 확산시켰다.2. 3. 1. 영국
1940년, 정보부는 영국인들이 "평범한 독일인에 대해 진정한 개인적 적개심을 거의 품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개인의 분노 ... 독일 국민과 독일을 향한" 분노를 심어주기 위해 "분노 캠페인"을 시작하여 독일인에 대한 영국의 결의를 강화하려 했다.[75] 로버트 반시타트 경은 1941년까지 외무부의 수석 외교 자문관으로, 라디오 방송에서 독일은 "질투, 자기 연민, 잔인함"으로 성장한 국가이며, 그 역사적 발전이 "나치즘의 토대를 마련"했고, 나치즘이 "결국 독일 영혼의 어두움을 드러냈다"고 말했다.[75]영국 여론 연구소(BIPO)는 1939년부터 1943년까지 여론 조사를 통해 "영국의 주된 적이 독일 국민인가 나치 정부인가"를 질문했다. 1939년에는 응답자의 6%만이 독일 국민을 비난했으나, 블리츠와 1940년의 "분노 캠페인" 이후 50%로 증가했다가 1943년까지 41%로 감소했다. 1942년 홈 인텔리전스는 독일을 향한 공식적인 증오의 태도에 대해 그러한 증오가 전쟁 후 합리적인 해결의 가능성을 방해할 수 있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보고했다.[76]
J.R.R. 톨킨은 1944년 아들 크리스토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론이 괴벨스만큼이나 독일 지휘관을 비난하고, 독일 국민 전체를 전멸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괴로움을 표현했다.[77]
같은 해 매스 옵저베이션은 영국 인구의 54%가 독일 국민에게 동정을 표하고 전쟁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등 "친독일적"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나치 정권과는 반대로 독일 국민에 대한 이러한 관용은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증가했다. 1943년 매스 옵저베이션은 영국 국민의 최대 60%가 독일인과 나치를 구별하고 있으며, "증오, 앙심 또는 보복의 필요성"을 표현하는 사람은 약 20% 정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립했다. 이 시기의 영국 영화 선전 역시 나치 지지자와 독일 국민 사이의 구분을 유지했다.[76]
2. 3. 2. 미국

1931년부터 1940년 사이에 114,000명의 독일인과 수천 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이들 중 다수는 유대계 독일인이거나 나치 박해를 피해 도망온 반파시즘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리온 포이히트방거, 베르톨트 브레히트, 헨리 키신저, 아르놀트 쇤베르크, 한스 아이슬러, 토마스 만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78] 전쟁 전 몇 년 동안에는 약 25,000명이 친나치 단체인 독일계 미국인 동맹(German American Bund)의 유료 회원이 되기도 했다.[79]
스미스법(Alien Registration Act of 1940)에 따라 독일 국적을 가진 30만 명의 독일 출신 영주권자는 연방 정부에 등록해야 했고, 여행 및 재산 소유 권리가 제한되었다.[80][81] 여전히 유효한 외국인 및 반역법(Alien Enemy Act of 1798)에 따라, 미국 정부는 1940년에서 1948년 사이에 약 11,000명의 독일 시민을 강제 수용했다. 알려지지 않은 수의 "자발적 피수용자"들이 수용소에서 배우자와 부모와 합류했고, 그들은 떠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82][83][84]
유럽에서 전쟁이 진행되었지만 미국은 중립국이었기에, 많은 신규 채용이 필요한 대규모 국방력 증강이 이루어졌다. 사기업들은 비시민권자나 독일 또는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시민을 고용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는 충성스러운 미국인들의 사기를 위협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를 "어리석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1941년 6월, 그는 행정 명령 8802를 발표하고 공정 고용 실천 위원회를 설치했는데, 이 위원회는 흑인 미국인도 보호했다.[85]
루스벨트 대통령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장군, 체스터 W. 니미츠 제독, 칼 앤드루 스파츠 장군 등 독일계 미국인을 전쟁의 중요한 직책에 기용했다. 그는 공화당원인 웬델 윌키를 개인 대표로 임명했다. 유창한 독일어 실력을 가진 독일계 미국인들은 전쟁 시 정보에 중요한 자산이 되었고, 번역가이자 미국의 스파이로 활동했다.[86] 전쟁은 독일계 미국인들 사이에 강력한 친미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들은 이미 옛 조국에 있는 먼 친척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87][88][89]
2. 3. 3. 브라질
1942년 브라질이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전한 후,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 브라질의 거의 모든 도시에서 반독 감정 시위가 일어났다.[1] 바이아의 살바도르에 있는 수어디크 담배 공장을 포함한 독일 공장, 상점, 호텔 등이 폭도들에 의해 파괴되었다.[1] 가장 큰 시위는 히우그란지두술주의 포르투알레그리에서 일어났다.[1] 브라질 경찰은 미국이 일본계 미국인을 억류하는 데 사용한 것과 유사한 억류 수용소에 "추축국 국민"을 박해하고 수용했다.[1] 전쟁 이후 독일 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않았고, 독일어 신문은 완전히 사라졌으며, 독일어 사용은 가정과 이민 1세대에 한정되었다.[1]2. 3. 4. 캐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캐나다에도 반독 감정이 존재했다. 전시 조치법에 따라 약 26개의 포로 수용소가 문을 열었고, 독일, 이탈리아, 특히 일본에서 태어난 사람들 중 "적국 외국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이 수용되었다. 독일인의 경우, 이는 특히 캐나다 국민 통합당과 관련이 있는 미혼 남성에게 적용되었다. 전쟁 후 그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지급되지 않았다.[95]온타리오에서 독일계 캐나다인을 위한 가장 큰 수용 시설은 페타와와 캠프였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750명이 수용되었다.[96] 일부 수용소 거주자는 이미 캐나다로 이민 온 독일인이었지만, 대부분은 유럽 출신이었으며, 전쟁 포로가 대부분이었다.[97]
나치 정권을 피해 유럽에서 도망쳐 온 711명의 유대인 난민은 윈스턴 처칠의 요청으로 뉴브런즈윅주 리플스의 캠프 B70에 수용되었는데, 처칠은 그들 중에 독일 스파이가 있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98] 수용자들은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캠프를 덥히기 위해 목재를 베고 장작을 패는 일도 해야 했다. 1년간의 수용 생활 후, 난민들은 전쟁에 기여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전쟁에 참여하거나 캐나다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졌다. 1941년에 캠프는 일시적으로 폐쇄되었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포로 수용소로 전환되었다.[98]
2. 3. 5. 체코슬로바키아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포스톨로프르티와 자테츠에서 2,000명의 독일인을 학살했다.[99] 1945년 여름에는 독일인들을 상대로 한 여러 사건과 지역 학살이 발생했다.[100]피렌체에 있는 유럽 대학교 연구소에서 수행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사례를 제시한다.[101]
- 프르제로프 사건: 남성 71명, 여성 120명, 어린이 74명이 사망했다.
- 브르노 강제 이주: 30,000명의 독일인이 오스트리아 근처의 노동 수용소를 위해 브르노의 집에서 강제로 이주당했으며, 행진 중 수백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우스티 학살: 사망자는 30명에서 700명으로 추정된다. 일부 여성과 어린이는 다리에서 엘베 강으로 던져져 총에 맞았다.
1946년 법률 제115호(베네시 포고령 참조)는 "1938년 9월 30일부터 1945년 10월 28일 사이에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자유 투쟁을 돕거나 점령군과 그 협력자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보복을 나타내는 모든 행위는, 그러한 행위가 다른 경우에는 법에 의해 처벌받을 수 있더라도 불법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결과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독일인 추방 중 저질러진 잔학 행위는 합법화되었다.[102]
2. 3. 6. 노르웨이
노르웨이 주둔 독일군 전쟁 포로들은 자기들의 지뢰밭을 직접 제거하도록 강요받았고, 그 위를 걸어가야 했다. 이로 인해 수백 명의 포로가 사망하거나 불구자가 되었다.[103][104]2. 3. 7. 소련
1937년 7월 25일, NKVD 명령 제00439호에 따라 소련 내 독일 시민 및 전 시민 55,005명이 체포되었고, 이 중 41,898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105][106][107] 소련은 독일군의 빠른 진격으로 인해 서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모든 독일인 정착민을 추방하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비밀 경찰인 NKVD는 우크라이나의 독일계 주민 중 35%만을 강제 이주시킬 수 있었다. 1943년, 나치 독일의 인구 조사에서는 소련 점령지에 313,000명의 독일계 주민이 등록되었다. 소련의 재정복으로 인해 Wehrmacht는 약 30만 명의 독일계 러시아인을 대피시켜 본국으로 데려갔다. 얄타 협정 조항에 따라,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에 거주하던 모든 전 소련 시민은 대부분 강제로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했다. 20만 명이 넘는 독일계 러시아인이 서방 연합군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이송되어 굴라그로 보내졌다. 전쟁이 끝난 직후, 러시아에서 온 100만 명 이상의 독일계 주민이 시베리아와 중앙 아시아의 특별 정착촌과 노동 수용소에 있었다. 1940년대에는 20만에서 30만 명이 기아, 거처 부족, 과로,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108]이후 전쟁 중 독일인들은 강제 노동에 사용될 것으로 제안되었다. 소련은 자국 영토 내의 독일계 주민을 추방하여 강제 노동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1955년 말까지 형사 기소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전 거주 지역으로 돌아갈 권리와 이전의 자결권은 돌려받지 못했다.[109] 제2차 세계 대전 말과 독일 점령 기간 동안, 소련군은 독일 마을을 침략하여 독일 여성들을 대량으로 강간했다. 역사학자 앤터니 비버는 "소련 지역에 살거나 독일 동부 지역에서 추방된 최소 1,500만 명의 여성 중 상당수가 강간당했다"고 추정한다.[110]
2. 4. 전후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인에 의해 국가 주도의 대량 학살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다.[111] 그로 인해 피해자들의 가족과 친구들은 반독 감정을 갖게 되었다.나캄은 1945년에 홀로코스트 생존자 약 50명으로 구성된 단체로, 홀로코스트 기간 동안 600만 명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복수로 독일인과 나치를 살해하려 했다.
3. 현대의 반독 감정
대한민국에서 반독 감정은 주로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손흥민 선수는 독일에서 인종차별을 경험한 후, 독일전 승리를 "인생 최고의 경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87][188][189] 방탄소년단을 코로나에 비유한 독일 라디오 진행자의 발언은 대한민국 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190][191]
3. 1. 이스라엘
홀로코스트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에서는 독일 문화에 대한 거부감이 존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러한 경향은 점차 완화되는 추세이다.2008년 3월,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은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하도록 초청받은 최초의 외국 정부 수반이 되었으며, 독일어로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이에 항의하며 자리를 떴는데, 이들은 "유대인들이 독일어 소리를 들을 때 홀로코스트를 기억하게 될 일종의 전기적 파동을 만들어낼" 집단 기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27]
2008년 10월, 한 연구자 하난 바르(חנן בר)는 인터뷰에서 독일에 대한 이스라엘의 모호한 태도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평범한 이스라엘인이 독일과 네덜란드의 축구 경기를 보게 된다면, 그는 자동으로 네덜란드를 응원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 세탁기를 살 때는 독일 모델을 최고라고 생각하며 선호할 것이다."[128]
3. 2. 유럽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반독 감정이 강하게 남아있다.[131][132] 특히 전쟁 중 독일에 점령되었던 국가들에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유럽 재정 위기 당시 독일의 역할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나타났다. 그리스 정부 부채 위기와 유럽 연합 주도의 긴축 조치가 그리스에 부과되면서 반독 감정이 다시 나타났으며, 일각에서는 독일이 그리스 부채 위기 동안 이익을 얻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169][174][175][176][177][178][179][180][181]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배상금 문제가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BBC 월드 서비스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대체로 독일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이 우세하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부정적인 여론도 존재한다.
연도 | 여론 조사 대상 국가 | 긍정 | 부정 | 긍정 – 부정 |
---|---|---|---|---|
2017[129] | 그리스 | 29% | 50% | -21 |
터키 | 45% | 36% | 9 | |
파키스탄 | 21% | 20% | 1 | |
러시아 | 31% | 29% | 2 | |
페루 | 45% | 28% | 17 | |
인도 | 40% | 17% | 23 | |
인도네시아 | 48% | 20% | 28 | |
멕시코 | 54% | 25% | 29 | |
스페인 | 56% | 26% | 30 | |
케냐 | 64% | 19% | 45 | |
브라질 | 63% | 18% | 45 | |
미국 | 70% | 17% | 53 | |
나이지리아 | 71% | 16% | 55 | |
캐나다 | 73% | 15% | 58 | |
프랑스 | 79% | 17% | 62 | |
호주 | 79% | 10% | 69 | |
영국 | 84% | 14% | 70 | |
중국 | 84% | 13% | 71 | |
2014[130] | 이스라엘 | 25% | 38% | -13 |
스페인 | 44% | 40% | 4 | |
인도 | 32% | 26% | 6 | |
파키스탄 | 35% | 27% | 8 | |
중국 | 42% | 22% | 20 | |
멕시코 | 45% | 24% | 21 | |
페루 | 44% | 22% | 22 | |
터키 | 47% | 24% | 23 | |
인도네시아 | 53% | 28% | 25 | |
칠레 | 47% | 18% | 29 | |
나이지리아 | 63% | 23% | 40 | |
일본 | 46% | 3% | 43 | |
케냐 | 58% | 15% | 43 | |
러시아 | 57% | 12% | 45 | |
브라질 | 66% | 21% | 45 | |
독일 | 68% | 19% | 49 | |
가나 | 72% | 13% | 59 | |
미국 | 73% | 13% | 60 | |
캐나다 | 77% | 10% | 67 | |
프랑스 | 83% | 11% | 72 | |
영국 | 86% | 9% | 77 | |
대한민국 | 84% | 6% | 78 | |
호주 | 86% | 7% | 79 |
3. 2. 1. 영국
축구 문화에서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들 사이에서 반독 감정은 흔히 나타나는 주제이다. 잉글랜드와 독일의 축구 경기에서 팬들은 잉글랜드와 독일 간의 축구 라이벌리를 영국과 독일 제국 간의 역사적 군사적 갈등과 연관시키는 반독일 축구 응원가를 부르곤 한다. 예를 들어 "두 번의 세계 대전과 한 번의 월드컵"은 독일의 1918년과 1945년의 군사적 패배를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의 패배와 연결하며, "텐 저먼 봄버"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의 독일 공군(Luftwaffe) 작전을 언급한다.[139] "텐 저먼 봄버"는 현재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UEFA와 잉글랜드 축구 협회(FA)는 잉글랜드 팬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금지했다.[140][141][142]최근 축구에서 나타나는 반독 감정의 대부분은 잉글랜드 팬층 내에서만 나타나며,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 팬들은 독일 팀과의 경기에서 부정적인 행동이나 응원가를 거의 보이지 않았다.
현대 영국 언론은 때때로 반독 감정을 표현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언급과 현대 독일 연방 공화국을 나치 독일과 동일시하는 고정관념적 연상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이러한 헤드라인은 종종 영국 유럽 연합 회의론적 시각과 결합되어, 특히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간행물에서 유럽 연합의 나머지 국가에 대한 독일의 지배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145][146][147]
3. 2. 2. 폴란드
많은 폴란드인들은 독일인들을 오랜 억압자로 인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독일어와 문화를 사용하는 프로이센과 통일된 독일 국가가 폴란드 민족과 오랫동안 지속해 온 갈등의 역사에 근거한다. 폴란드 분할과 독일화로 시작되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1939년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그 뒤에 이어진 잔혹한 점령으로 절정에 달했다.[148]폴란드와 통일 이후의 독일은 전반적으로 대체로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몇 가지 문제들로 인해 최근의 폴란드-독일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149] 발트해를 통한 러시아-독일 파이프라인 건설 계획은 폴란드에게 독일로의 공급에는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폴란드의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공급을 차단하려는 의도로 비춰졌다. 폴란드 외무부 장관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는 이를 굴욕적인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에 비유하기도 했다.[150]
폴란드 선거에서는 법과 정의당이 반복적으로 반독일 캠페인을 벌였으며, 이는 반독일 수사가 득표를 위한 효과적인 전술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151][152][153]
3. 2. 3. 네덜란드
독일 통일과 독일 제국 수립(1871년 완성) 이전부터 네덜란드에는 반독일 감정이 널리 퍼져 있었다. 네덜란드인들은 17세기, 네덜란드 황금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독일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당시 네덜란드 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되고 강력한 국가 중 하나였지만, 현대 독일은 여전히 전쟁 중인 여러 봉토들의 집합체였다.[154]17세기 전반, 네덜란드 공화국에는 일반 노동자(hannekemaaiers), 종교 탄압을 피해 온 루터교 신자와 유대인, 30년 전쟁의 폭력에서 도망친 전쟁 난민 등 독일 이민자들이 급증했다. 곧 문화 충돌이 발생했고, 독일 이민자들은 종종 네덜란드 원주민들에게 차별을 받았다.[154] 이 시기에 하층 계급 독일 이민자를 지칭하기 위해 "mof"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독일인들이 어리석고, 거만하고, 불결한 전형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유머집이 알려져 있다.[155]
제2차 보어 전쟁 동안에는 양국이 보어 공화국을 지지하여 시민들이 함께 싸우기 위해 자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반독일 감정이 약해졌다. 제1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는 중립국) 동안, 벨기에 점령 독일군이 네덜란드 남부 국경을 따라 건설한 2000 볼트의 전기 울타리인 죽음의 철사로 인해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사망하면서 반독일 감정이 다시 고조되었다.[156]
이 감정은 1940년,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의 중립성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침공을 감행하면서 증오로 변했다.[157][158] 이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기간 동안 10만 명 이상의 네덜란드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1944–45년의 헝거 윈터 동안 기아가 나라의 많은 부분을 덮쳤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노인들은 로테르담 폭격을 포함한 이 사건들을 몹시 기억하고 있으며, 일부는 여전히 독일 땅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거부한다.[154]
1998년의 사회학 연구에 따르면,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전된 지 두 세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현재의 부모와 젊은이들은 독일에 대해 부정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159] 아스페라그와 데커는 1998년에 "195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반독일 감정을 품고 있는지 묻는 질문에 '가끔' 또는 '자주'라고 대답했다"고 보고했다.[160] 1990년대의 3건의 대규모 학술 연구를 검토하면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감정은 제2차 세계 대전에 의해 규정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기념하는 연례 행사, 역사 수업에서 독일을 다루는 방식, 그리고 어른들의 일상적인 부정적인 발언은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독일과 독일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재생산한다.[161]
최신 연구에서도 네덜란드의 반독일 감정이 수년간 꾸준히 감소하고 있으며,[162] 오늘날 대부분의 네덜란드인들이 독일과 독일 국민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보이고 있음을 일관되게 보여준다.[163][164]
3. 2. 4. 스위스
2000년 이후 독일인의 스위스 이민이 급증하면서 독일어권 스위스에서 "독일 혐오" 현상이 나타났다.[165]3. 2. 5. 그리스 및 이탈리아
유럽 재정 위기 당시, 많은 국가들이 긴축 프로그램을 시작하거나, 불가피하게 긴축 정책을 시행해야 했다. 그 결과로 발생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결과에 대해 독일은 비난을 받았다.[166][167][168]그리스 정부 부채 위기와 EU 주도의 긴축 조치가 그리스에 부과되면서 반독 감정이 다시 나타났다.[169] 그리스 언론은 독일 정책에 비판적인 논평을 게재하며, 종종 그리스의 추축국 점령과 비교했다. 일부 논평가들은 "고트족" 또는 "훈족"으로부터의 유전적 유산을 강조하기도 했다.[170][171] 2012년 VPRC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그리스에는 반독 감정이 존재하며, 응답자의 대다수가 독일을 "히틀러", "나치즘", "제3제국"과 같은 부정적인 개념과 연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172]
주요 논쟁 중 하나는, 독일이 여러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부채 위기 동안 이익을 얻었다는 것이다. 독일은 다른 강력한 서방 경제국과 함께 위기 동안 투자자들에게 안전 자산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차입 금리가 하락하고,[173] 투자가 유입되었으며, 유로화 가치 하락으로 인해 수출이 증가하여, 추정치는 1000억유로에 달했다.[174][175][176][177][178][179][180][181] 대출을 통한 이익도 있었다.[182] 또 다른 핵심 문제는 여전히 미지급된 전쟁 배상금에 대한 주장으로, 추정치는 2790억유로에 달한다는 것이다.
2012년 8월, 이탈리아 총리 마리오 몬티는 유로 부채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논쟁이 격화되면서 국가들이 서로 반목하고 유럽을 분열시킬 위협을 가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독일, 유럽 연합,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있다고 말하며, "압력은 이미 유럽의 심리적 붕괴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덧붙였다.[183]
2017년 여름, EU 회원국 10개국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가 실시되었다. 대부분의 응답자는 유럽 문제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으며, 그리스인(89%)이 가장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탈리아인(69%)과 스페인인(68%)이 그 뒤를 이었다. 또한, 그리스인은 앙겔라 메르켈에 대해 가장 부정적인 의견(84%)을 보였으며, 질문을 받은 10개국 중 독일 국민에 대해 가장 긍정적이지 않은 의견(24%)을 보였다.[184]
4. 대한민국 내 반독 감정
대한민국 내 반독 감정은 주로 인종차별로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감정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선수에게도 나타난 사례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손흥민이 "독일에서 인종차별을 당해 복수에 성공한 독일전이 내 인생에서 최고의 경기였다"라고 평가했다. 손흥민 선수는 어릴 적에 독일에 간 적이 있는데 인종차별을 많이 경험하였고, 이를 갚아준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경기가 되었다는 것이다.[187][188][189]
민간에서도 독일에서 당한 인종차별에 대한 경험이 공유되고 공론화되기도 한다. 방탄소년단을 코로나에 비유한 독일의 라디오 진행자의 이야기가 한동안 대한민국 내에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19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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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민 “어릴 적 인종차별 아픔 되갚아준 독일전이 인생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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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드플레이도 극찬했는데…"코로나 같은 BTS" 독일서 인종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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